싯다르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의 배경, 줄거리, 그리고 인상 깊은 구절들을 상세히 소개합니다.
Contents

책의 배경
  성장 소설의 경우, 많은 경우는 어린 아이가 외적/내적 성장기에 혼란을 겪으며, 스스로의 아픔을 이겨내며 어른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스스로 어린 아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작은 일에 목숨걸거나 짜증을 내고 괴로워할 때마다 아직도 속좁고 철없는 어린아이라고 느낀다. 스스로 더 나은 어른이 되고 싶어서 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참된 나" 를 찾아가는 길은 어렵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도 비슷한 괴로움이 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헤르만 헤세가 겪었던 세계는, 지금의 내가 겪는 세계보다 괴로움이 많은 세계였다. 헤르만 헤세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적, 작가적 고뇌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1921년부터 1년 반 정도의 시간동안 창작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우울증에 빠졌고, 정신 치료를 받은 후 싯다르타를 집필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싯다르타를 읽고 내면의 잔잔한 감동이 있었는데, 헤르만 헤세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참된 자아를 찾지 않았을까 궁금하고 기대된다.
줄거리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의 주인공인 싯다르타가 흔히 우리가 아는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생각했었다. 이 책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일생에 소설적인 요소를 섞은 책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인 싯다르타는 철저히 가상의 인물이다. (심지어 우리가 아는 부처님인 고타마는 별도의 인물로 등장한다.) 
  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난 싯다르타는 유복하게 자랐으며,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도 큰 기쁨과 행복을 주는 존재이지만, 정작 자기 스스로에게는 기쁨을 주지 못하였고, 내면에는 스스로에 대한 그리움이 쌓여갔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영원히 행복하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내면을 비우고, 갈증과 소망과 기쁨과 번뇌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싯다르타는 그의 친구 고빈다와 함께 집을 떠나 사문 (자유사상가) 생활을 시작한다. 그들은 명상을 하고 고통과 굶주림과 권태를 극복함으로써 초월의 길을 간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수련을 해도 그들은 원했던 해탈과 깨달음을 할 수는 없었다. 마치 해탈을 욕심내는(?) 듯한 집념에 사로잡힌 듯 했다. 그러던 도중 그들은 부처인 고타마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다. 그들은 사문 생활을 청산하고 고타마를 찾아 떠났고, 고타마의 설법을 듣는다. 싯다르타의 친구 고빈다는 고타마의 제자가 되지만, 싯다르타는 아무리 고타마라 하더라도 해탈의 지혜를 말로 가르칠 수는 없다 생각하여 스스로 수련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 때 싯다르타는 특이한 결정을 하는데, 기생 카말라에게서 사랑의 기술을 배운다. 또한 장사꾼 아래에 들어가 사업을 배우며 재산을 모으기도 한다. 철저한 세속 생활을 하며 그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수 년 후, 그러한 생활에 빠져버린 자신이 영원한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 완전 빠져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사문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잃었고, 웃는 법도 잊었고, 이전과는 달리 각박하고 급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싯다르타는 세속 생활을 청산하고, 뱃사공 바주데바의 조수가 된다. 바주데바는 배운 것이 없고 천한 사람이었지만, 그 주변에 있는 강으로부터 깊은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었다. 바주데바는 강처럼 싯다르타의 고통을 들어주었고, 때로는 싯다르타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길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도 그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바주데바와 같이 생활하면서, 싯다르타는 모든 존재의 단일성에 대해 깨닫는다. 모든 존재에는 모든 존재들의 모습들이 담겨 있으며,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 모든 존재는 물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지만, 바다를 지나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기도 한다. 또한 강의 물은 모두가 모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수 년이 지난 후, 바주데바는 싯다르타를 떠나지만 싯다르타는 계속 뱃사공으로 남는다. 사람들은 뱃사공 싯다르타에게 가르침을 얻으러 찾아오기도 한다. 어린 시절 친구였던 고빈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고빈다는 그 뱃사공이 싯다르타임은 알지 못하였다. 고빈다는 아직 세상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싯다르타는 아직 괴로움에 싸여 있는 고빈다에게 자신의 깨우침을 말로나마 전달해주고, 고빈다는 눈물을 흘리며 싯다르타에게 인사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인상깊은 구절들
- 사문 시절 스스로 고뇌하며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싯다르타
 
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의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자기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언제나 가장 현명한 자였고, 언제나 최고의 열성파였으며, 언제나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으며, 현인이었다. 이런 사제 기질 속으로, 이런 교만한 마음속으로, 이런 정신적 성향 속으로 자기의 자아가 살며시 파고들어와서는 거기에서 단단히 자리를 잡고 앉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동안, 자기는 단식과 참회로써 그 자아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어떤 스승도 어차피 자기를 구제해 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던 그 내밀한 음성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많이 겪게 되는 일이어서 공감이 되었다. 진정한 성장은 스승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온다는 사실이다. 나 스스로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괴로워하고, 수련하고,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지만 때로는 이러한 루틴들이 오히려 나를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만들고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진정한 깨달음은 나 스스로에게서 찾아야 한다.
- 가르침을 받으러 온 고빈다와, 뱃사공인 싯다르타의 만남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스님, 당신은 어쩌면 실제로 구도자일 수도 있겠군요.
내가 자주 하는 실수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문제가 생기면 해결방안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때문에 스스로 마음가짐이 급해지고, 때로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한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구하지 말고 찾으라고 말한다. 한 발짝 뒤에 서서 자유롭고 열려있는 상태에서 일을 생각해 보면, 더 나은 해답이 종종 나오는 것 같다.
- 가르침을 받으러 온 고빈다와, 뱃사공인 싯다르타의 만남
 
고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말이나 글로)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 싯다르타가 고빈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나도 죄인이고 자네도 죄인이야. 그러나 그 죄인이 언젠가는 다시 브라흐마가 될 것이고, 그 죄인이 언젠가는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고, 부처가 될 거야. 그런데 이걸 알아두게. 이 <언젠가>라는 것은 착각이고 다만 비유에 불과한 것임을 말이야! 그 죄인은 불성으로 나아가고 있는 도중에 있는 것이 아니야. 그 죄인은 어떤 하나의 발전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야. 비록 우리의 사유라는 것이 만사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달리 생각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지. 그 죄인의 내면에는 지금 그리고 오늘 이미 미래의 부처가 깃들어 있다. 바로 그런 이야기야. 그 죄인의 미래라는 것은 모두 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네. 자네는 그 죄인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아니 모든 중생 개개인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바로 그 생성되고 있는 부처를, 바로 그 부처가 될 가능성을 지닌 부처를, 바로 그 숨어 있는 부처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네. 고빈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이 세계는 매순간순간마다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자체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이 스스로의 인생 행로에서 얼마만큼 나아간 경지에 있는가를 감히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는 없네.
가르침을 달라는 고빈다에게, 싯다르타는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읽었지만, 읽을수록 내가 세상을 살면서 지녀보면 현명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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