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작가의 소소한 행복을 담은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을 읽고, 일상 속 작은 순간의 소중함을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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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을 살며 무심코 지나가는 순간들이 많다. 사실 기억에 남는 순간보다 흘려보내는 순간들이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운동을 끝난 후 먹는 음료수, 아무도 없는 도로를 자전거로 가로지내는 순간들이 지나가는 순간들일 것이다.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을 읽으면, 작가의 사소한 행복들을 한 걸음 뒤에서 느껴볼 수 있다. 왜 한 걸음 뒤라고 표현했냐면, 잘 모르는 프랑스 문화들이 꽤 있어서 정확히 어떠한 문맥인지 챗지피티등을 통해 검색해보며 책을 읽어야 했다. 예를 들어 '아페리티프(aperitif)라면 거절만 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읽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며 읽었다. 신기한 점은 처음 알게된 문화여도 프랑스 사람들이 어떠한 뉘앙스로 그것을 말하는지 대부분은 이해가 되었다는 점이다.

혹시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아페리티프(aperitif)는 식전주를 의미하는데, 보통 식사 분위기를 돋우거나 식욕을 돋우기 위해 가볍게 마시는 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술은 안먹어도 건배는 같이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과 비슷한 문화일 것 같다.

  이처럼 문화가 다른 독자가 읽어도 행복에 대한 공감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사회와 문화가 달라도 행복의 언어는 같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나는 1년에 크루아상을 10개도 먹지 않겠지만, 프랑스 사람이 쓴 글을 읽고 따뜻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봉지에서 크루아상 하나를 집어 든다. 따뜻한 기운은 여전한데 반죽은 조금 물러진 것 같다. 차가운 이른 아침을 걸으며, 약간의 식탐도 부리며 먹는 크루아상. 겨울 아침은 당신 몸 안에서 크루아상이 되고, 당신은 크루아상의 오븐과 집과 쉴 곳이 된다.

  물론 빵보다 쌀과 면을 5배는 많이 먹는 아시아 사람에게 이런 행복감을 느끼게 만들어 준 작가의 표현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생소하고 행복한 장면들도 있었는데, 완두콩 까는 일이 그 예시이다.

완두콩을 까다 보면 아무 얘기라도 나직하게 주고받게 된다. 노랫소리와도 같은 이런 말들은 우리 마음의 깊고 평온하고 친숙한 곳에서 샘솟는 것처럼 느껴진다.

앞으로의 계획, 최근의 피로 등에 대해 말하지만, 애써 분석하지는 않는다. 완두콩 깍지를 까는 시간은 설명을 하거나 그것을 듣는 시간이 아니다. 그냥 가볍게 까닭 없이 그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집에서 완두콩 깍지를 자주 까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상황인지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빨래를 개거나 만두를 빚으며,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반대로 프랑스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행복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딱 한 모금이다. 두번째로 넘어가는 맥주는 점점 더 싱거워지고 평범해진다. 미적지근하고, 들쩍지근하고, 두서없이 질척거릴 뿐이다. 마지막 모금은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첫 모금의 힘 같은 것을 되찾을지도 모르지만…

맥주를 마시면 마실수록 기쁨은 점점 더 줄어든다. 이것은 씁쓸한 행복이다. 우리는 첫 모금을 잊기 위해 계속 마신다.

  이처럼 이 책에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하지만 보통 흘려버리는 행복들로 가득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에피소드는 '호주머니 속 작은 칼'이다. 흔히 말하는 주머니칼, 스위스 아미 나이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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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에는 이러한 주머니칼에 엄청 관심이 많았다. 나무 껍데기를 자를 수도 있고, 햄이나 젤리 등을 자르는 데에도 쓸 수 있다. 돈이 있으면 좋은 주머니칼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작가께서도 아마 비슷한 유년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땐 그런 칼이 너무도 멋져 보였다. 우리는 그것으로 활이나 화살, 나무칼을 만들곤 했다. 나무나 과일 껍질에 뭔가를 새겨 넣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애들이 칼을 가지고 노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라며 말리곤 하셨다.

그러나 이제 어디에나 그런 칼을 쓴단 말인가? 방금 말한 멋진 노인이 사는 세상도 아니고, 더구나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한, 호주머니 속 칼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칼이거나 추억을 소환하는 하찮은 알리바이일지 모른다.

  이 문장들을 읽고 몇 분동안 생각을 했다. 주머니칼은 더이상 행복이 아니게 된걸까, 혹은 잊어버린 것 뿐인걸까. 아마 지금 내가 주머니칼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어렸을 때처럼 화살을 만들거나 나무를 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주머니칼을 떠올리며 행복을 떠올리는 것일까.



  최근에 본 드라마 중 The Bear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7. Pork, Season2)가 있다. 이 드라마는 식당이 배경인데, 리치라는 인물은 방황하며 주변 인물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인턴을 하게 되는데, 주방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시계 아래에 적혀있었다.

Every Second Counts

  듣기만 해도 숨막히는 상황이다.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파인다이닝 주방에 적힌 문구는 리치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그는 이런 곳에서 일하기 싫어했지만,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그만두기도 싫었다. 그저 일을 구만두기 싫어 인턴이 끝나길 '버티는'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던 그에게도 좋아하는 일이 생긴다. 손님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며 기쁨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의 매니저는 리치에게 동네 피자가게에서 피자를 사온 후, 손님에게 서빙하라는 지시를 한다. 리치는 의아했지만, 버티는 것이 그의 목표였기 때문에 성실히 그 말에 따른다. 그런데 손님이 너무 기뻐하고 감동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게 된다. 그 손님은 고향에 오랜만에 들렀지만, 일정상 그가 좋아하던 시카고 피자는 먹지 못하고 다음날 떠날 예정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정을 매니저가 듣게 되었고, 리치에게 피자가게에서 피자를 사오라는 지시를 한 것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리치는 '버티기' 위해 일하는 아닌, 손님의 기쁨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의 인턴생활도 금방 끝나게 되었다. 마지막 출근날 우연히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를 만나게 되었는데, 우연히 셰프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리치: 식당을 차릴 돈은 어떻게 구하셨어요?
셰프: 그해 전년도 여름에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난 외동이었고, 엄마는 집을 팔아 이 곳에 투자하셨어요.

리치: 아빠와는 친하셨어요?
셰프: 정말 웃긴 게 아빠에 대해 그나마 알게 됐던 건 집을 정리하면서였어요. 유품을 정리하면서 아빠에 대해 안 거죠. 여행 수첩들이 한 무더기 있었어요. 별의별 걸 다 써 놨죠. 자기가 본 야자수 나무, 먹어 본 에스카르고, 보라색 빛깔 바닷물…
셰프: 그걸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순간을 잊지 말자고요. 이런 자질구레한 디테일을 잊지 말자고요. 수백가지는 되었죠. 그리고 매번 똑같은 글귀로 끝맺었어요.

(셰프는 급한 일이 생겨 주방을 벗어난다.)

리치: 그런데 아버지가 어떤 글귀로 끝맺었어요? 그 수첩에…

(셰프가 이미 떠난 것을 알고 리치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다.)

  셰프에게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리치는 주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어붙고 만다. 벽에 그 대답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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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점에 따라서 이 문장은 아예 다른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버티기' 바빴던 리치의 상황에서 이 문장은 압박감의 상징이었지만, 이제 그에게 이 문장은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라는 뜻이다.

  '크루아상을 사러 가는 아침'도 "Every Second Counts"라는 문장과 정말 어울리는 책이다. 매일 아침 크루아상을 사러 가는 순간, 완두콩을 가족과 함께 까는 날들, 맥주의 첫 모금.. 모두 무심코 흘려보내는 매 순간이다. 이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 기억하고 기록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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